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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열전> "불법조업 막아라"..최초 한·중 어업회담 (연합뉴스 2012.10.22)
  글쓴이 : 아시아문화…     날짜 : 12-10-24 10:39     조회 : 354    
<외교열전> "불법조업 막아라"..최초 한·중 어업회담
[연합뉴스] 2012년 10월 22일(월) 오전 07:01
1989년 서울-베이징 오가며 핑퐁회담..어업협정 기초

윤해중 前 대사 "홍콩채널 통해 끈질기게 제의해 성사"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을 막고 중국과의 채널을 뚫어라."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이었던 1989년 4월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의 수협중앙회 회의실에 한국과 중국 대표단이 마주 앉았다.

우리 수협중앙회와 중국 동황해어업협회가 만난 최초의 한ㆍ중 어업회담이었다.

우리 대표단에는 수협중앙회, 수산청 직원 외에 당시 윤해중 주홍콩 총영사관 영사와 외교부 본부 동북아2과 차석인 황정일 서기관이 수협중앙회 국제이사 등의 직함을 달고 참여했다.

중국은 이 회담을 위해 동황해어업협회라는 민간기관을 서둘러 만들었다. 우리 농림수산식품부격인 농업부의 쑹즈원(宋之文) 어정국(漁政局) 부국장이 협회장 명의로 단장을 맡았다.

양국간 조업 질서와 어업분쟁 방지 방안을 주제로 사흘간 열린 최초의 한ㆍ중 어업 회담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양측은 회담 사실이 언론에 흘러나가지 않도록 사전에 단단히 약속했다.

수교 전인 상황에서 대만과 북한의 반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간기관 이름을 빌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서해상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 문제는 한중 수교 이전부터 우리 정부의 큰 두통거리였다.

중국 어선 불법조업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태풍 등 기상악화에 따른 피항을 이유로 우리 수역에 중국 어선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때로는 수천 척의 중국 어선이 한꺼번에 몰려들기도 했다. 문제는 중국 어선들의 피항이 단순한 피항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중국 어선은 우리 수역에 닻을 내리고 고기를 잡는 경우가 잦았다. 우리 어선이 쳐놓은 어망을 찢고 도망가 어민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기 일쑤였다.

우리 어민 피해가 속출하자 당시 외무부에 '중공어선피항대책반'이 긴급 설치됐다. 중국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물밑 교섭은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1985년 중국 해군 어뢰정 난동사건 때 구축된 이른바 '홍콩 신화사 채널'이 창구로 이용됐다. 요즘의 북미간 `뉴욕채널'과 같은 역할을 당시 `홍콩채널'이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했다.

우리 정부는 이 채널을 통해 어업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을 중국에 수차례 제의했다. 한동안 묵묵부답이던 중국은 1989년 3월 한·중·일 3자 어업회담을 도쿄에서 개최하자는 답신을 홍콩의 신화사를 통해 보내왔다.

미수교국이라는 이유로 우리와 회담을 미뤄오던 중국의 태도 변화였다. 대신 중국은 일본을 끼워넣었다. 우리로서는 일본이라는 징검다리를 두고서라도 중국과 만나는 게 중요했다.

일본 도쿄 외무성 인근 대일본수산협회 관련 건물에서 3자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은 일본을 제쳐놓고 양자 접촉을 많이 했다. 양측은 결국 별도의 양자회담 필요성에 공감하게 됐다.

본국으로 돌아간 중국 대표단은 서울로 4월 중순께 대표단을 보내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윤 전 대사는 "홍콩 신화사 채널을 통해 보낸 메시지에 중국측이 이례적으로 화답한 것을 보니 우리의 집요한 노력에 중국이 호응하는 것 같아 매우 고무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중국은 서울에서 열린 첫 회담에서 갑작스런 기상 악화로 자국 어선이 대규모로 한국 바다로 피항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피항 어선이 고기를 잡거나 우리 어망을 찢고 도망가는 일을 내버려둘 수 없는 사정을 조목조목 밝혔다.

서울에서의 1차 회담은 5월 23일부터 사흘간 베이징에서 열린 2차회담으로 이어졌다.

양국은 이후 여러 차례 후속 협의를 거친 뒤 그해 12월 28일 서울에서 '해상사고처리 합의서'를 교환했다. 또 서해 안전조업과 긴급피난 문제를 규정한 한·중 어업 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1989년 양국 수도를 오가며 진행된 한중 어업회담은 이후 한중 어업협정의 본격적인 추진에 밑거름이 됐다. 양국은 2001년 6월 한중 어업협정을 발효시켰다.

정부가 당시 첫 어업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데에는 장기적으로는 수교를 염두에 두고 공식적인 접촉 창구를 확보하는데도 목적이 있었다.

어렵게 성사된 어업회담은 3년 후 역사적인 한중 수교(1992년 8월)의 기틀을 닦는데 일정 역할을 했다.

윤 전 대사는 "중국 민항기 피랍이나 해군 어뢰정 난동 사건은 돌발적인 사건·사고를 처리하면서 수교의 초석이 된 기념비적인 사건들"이라면서 "정부 차원의 끈질긴 노력을 통해 성사된 한중 어업회담은 구체적인 정부 실무 협의를 통해 '수교의 밑뿌리'가 된 경험이었다"고 평가했다.

◇윤해중 전 대사 = 1971년 홍콩 총영사관 부영사로 첫 해외 근무를 시작한 이래 중국, 홍콩, 대만 등 중화권에서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2차례 외무부 동북아 2과장을 맡았다. 1982년 중국 공군 조종사 망명사건, 1983년 중국 민항기 피랍 사건 당시 한중 교섭 실무를 담당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한국대표팀 참가를 위한 연락관으로 일하면서 중국에 상주한 첫 한국 외교관이 됐다. 정식수교 직전인 1991년에는 베이징 주재 대한민국 무역대표부 창설책임자로 활동했다.

1999년부터 주타이베이 대표부 대표로 3년간 일하면서 한중 수교 후 양국 간에 쌓인 오해를 푸는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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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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