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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간조선 (2012.9.10)
  글쓴이 : 아시아문화…     날짜 : 12-09-10 15:14     조회 : 461    

“대만의 반한감정 녹인 건 지진 때 한국인이 구한 아이 덕분 동양외교는 감성외교”

윤해중 前 주타이베이 한국대표부 대표

photo 유창우 영상미디어 부장
올해는 한국과 중화민국(대만) 단교 20주년이다.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수교하면서 대만과 외교관계를 끊었다. 대만은 한국의 일방적 단교에 격렬히 반발했다. 대만은 6·25전쟁 때 중공에 맞서 한국을 도왔고, 일제강점기에는 임시정부를 지원했기에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리 외교관들은 중국과 대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해야했다. 윤해중(67) 전 주타이베이(臺北) 한국대표부 대표(한국대사에 해당)도 그중 한 명이다. 1968년 외무부(현 외교통상부)에 입부해 대중외교만 30여년을 담당한 윤 전 대사는 한·중수교의 최전선에 있었다. 베이징(참사관), 상하이(총영사), 홍콩(부영사·부총영사)의 우리 공관을 거쳐 지난 1999년부터는 대만 타이베이 주재 한국대표로 양국 간에 쌓인 오해를 푸는 역을 맡았다.
   
   지난 2006년 외교통상부 본부대사를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윤 전 대사는 지난 8월 24일 한·중수교 20주년에 맞춰 30년간 대중외교에 얽힌 비사를 ‘한중수교 밑뿌리 이야기’란 책으로 펴냈다. 지난 9월 5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개인사무실에서 만난 윤 전 대사는 “3년 전부터 한·중수교에 얽힌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71년 홍콩에서 중국과 인연
   
   윤 전 대사가 중화권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1년 홍콩 총영사관 부영사로 발령받으면서부터다. 당시만 해도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은 대중외교의 격전장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외교관과 정보요원들은 대륙에서 흘러나오는 정보 수집에 혈안이 돼 있었다. 그는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위성TV로 지켜보면서 국제정세가 달라지는 것을 감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대학(한국외대 외교학과) 때만 해도 중국에 별 관심이 없었다. 제2외국어도 독일어를 택했다. 하지만 홍콩 근무를 시작으로 중국어에 관심을 가진다. 대만 국립사범대에서 발간한 교재를 구해 중국어 공부도 시작했다. 미얀마 아웅산테러로 사망한 함병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주미대사 역임)의 “한국 외교관들이 이제 중국어에 힘써야 한다”는 충고도 자극이 됐다.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 신설된 외무부 동북아2과장(중국과장)으로 일하던 그에게 전대미문의 사건이 터졌다. 중국 공군 우롱건(吳榮根) 상위가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경기도 수원비행장으로 넘어왔다. 윤 전 대사에 따르면, 중국은 자국 전투기 조종사의 대만 망명을 염려해 주로 북쪽에서 훈련을 했다. 이 때문에 중국 전투기 조종사들이 한국을 중간 기착지로 삼아 대만 망명을 요구했다.
   
   우롱건 상위가 한국으로 넘어온 이후 중국 공군 소속 전투기는 두세 달 간격으로 모두 5대가 넘어왔다. 관계당국에서는 “중국군 망명 전용 활주로를 만들자”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왔다. 특히 감시가 소홀한 주말이면 전투기가 넘어와 그는 주말이 되어도 쉬지 못하고 외무부에 대기했다. 휴대폰이나 삐삐가 없을 때였다.
   
   거듭된 중국 전투기 망명과 중국 민항기 납치(1983년), 중국 어뢰정 선상 반란(1985년) 등은 한·중 외교당국이 접촉하는 계기가 됐다. 윤 전 대사는 1992년 한·중수교에 앞서 수시로 중국을 넘나들었다. 수교 4년 전인 1988년부터 1989년까지는 민관 경제무역대표단의 일원으로 홍콩을 거쳐 산동성과 랴오닝성 등을 오갔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서는 중국에 상주한 첫 한국 외교관이 됐다. 정식수교 직전인 1991년에는 베이징 무역대표부 창설반장 겸 정무담당 책임자로 일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활동은 극히 제한돼 있었다. 북한과 대만의 눈길을 의식해서다. 윤 전 대사는 “사람을 접촉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어렵사리 우회 루트를 통해 소개받은 사람들과도 공개적으로 만날 수 없었다. 장소 선택에도 제한을 받아 호텔 로비와 커피숍을 배회하며 불륜 같은 만남을 지속했다.
   
   그를 비롯한 한·중 외교관과 기업인들의 물밑작전 끝에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를 체결한다. 윤 전 대사 역시 한국 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의 조어대(釣魚臺) 국빈관 방비원(芳菲苑)에서 열린 서명식을 지켜봤다.
   
   
   하나 주고 하나 받는 것과 달라
   
북한과 대만의 반발은 격렬했다. 수교로부터 7년이 지난 1999년, 그는 돌연 주타이베이 한국대표(한국대사에 해당)로 발령났다. 그는 “타이베이로 발령났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고 말했다. 한·중수교 전 물밑작전을 통해 대만의 등에 비수를 꽂은 장본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 그간 대만 대사는 의례적으로 군 장성 출신들이 맡아왔다. 그는 “아그레망을 받지 못하고, ‘페르소나 논 그라타(기피인물)’가 될 염려가 있었다”고 했다.
   
   곡절 끝에 타이베이로 갔지만 예상대로 대만의 반한감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웃주민들에게 “한국 대사”라고 소개하자, “대만에는 한국 대사가 없다”는 냉대가 돌아왔다. 부임 첫해 초대받은 에어쇼 때는 뜨거운 활주로 위에 햇볕가리개도 없는 말석이 주어졌다.
   
   하지만 부임 첫해인 1999년 대만 전역을 강타한 9·21 대지진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리히터 규모 7.6의 대지진으로 사망자만 2000여명을 넘었다. 윤 전 대사는 “당시 건물 사이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직접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구조대를 급파해줄 것을 설득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외교부는 숙원사업이던 민항기 운항 재개 문제가 해결이 안돼 대만과 감정이 안 좋은 상태였다. 또 중국 눈치도 봐야 해 우리 측은 15명의 소규모 구조대를 파견했다. 수백 명 규모의 일본에 비해 새 발의 피였다. 하지만 지진발생 100시간 만에 매몰돼 있던 6세 남자아이(장징홍군)를 한국구조대가 구해내며 상황이 바뀌었다. 윤 전 대사는 “대만 언론을 비롯해 미국 CNN이 집중보도하자 우리 대표부에 감사편지가 답지했고, 아파트 경비실과 헬스클럽에서도 사람들이 ‘고맙다’며 아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경험 덕에 윤 전 대사는 공공외교의 중요성을 늘 강조한다. 재해 구조와 스포츠 경기의 중요성이 공식 외교만큼 크다는 것. 그는 “대만과 관계회복에 지진구조가 기여했다면, 중국과 관계는 서울아시안게임(1986년), 서울올림픽(1988년), 베이징아시안게임(1990년)으로 급진전됐다”고 말했다.
   
   윤 전 대사는 “한·중·일 외교는 미국 등 서방과는 조금 달리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중국과 대만, 일본 등은 덕(德)과 화(和) 같은 동양적 미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나 주고 하나 받는 것과는 좀 달라요. 9·21 대지진 때가 대표적 예죠. 소통을 해가며 시시비비도 명확히 가려야 하겠지만 서방과는 조금 다른 틀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